- 거듭 고쳐 읽는 뼈 : 김의식의 ‘뼈’와 ‘쓰기’의 중의법에 관하여

정수경 (미학,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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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다 못해 빛이 날 것만 같은 커다란 뼈. X-ray 필름처럼 보이는 네 장의 흑백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옆에 걸린 원시 주술사의 가면 같은, 아마도 소의 두개골일 듯한 또 다른 뼈의 다중 노출 사진을 지나면 투명한 아크릴 상자 속에 커다란 소의 대퇴부 뼈가 하이라이트 조명을 받고 있다. 아까 그 뼈 사진의 실물일까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손가락 지문처럼 일정한 패턴을 이루는, 문자 비슷한 기호들의 문장 같은 나열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해독은 불가하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편집하고 뼈의 시뮬레이션 이미지를 끼워 넣은 약 12분짜리 영상 작품<Hommage de Stanley Kubrick>이 상영 중이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에서의 전시작들은 이처럼 ‘하얀 뼈’와 그 위에 이루어진 ‘쓰기’ 행위를 특징으로 하는 김의식의 최근 작품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겉보기엔 같아 보이는 하얀 뼈 위의 쓰기 작업에 대해 작가가 부여하는 의미가 작품별로, 또 시기별로 다르다. 작가 인터뷰에서 김의식은 <The Nature>(작품 1)의 소재인 뼈는 자신이 몇 년 전 겪었던 교통사고로 대변되는 트라우마의 대상으로, 그 위의 해독 불가한 쓰기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한 망각술(忘却術) 개념으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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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김의식의 작품 해설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소설집 『픽션들』에 실린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피에르 메나르의 텍스트는 언어상으로는 단 한 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지만, 메나르의 소설이 훨씬 더 오묘하며 풍부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한 때 표절을 정당화하는 논변으로 오용되기도 했던 이 난해한 혹은 난감한 주장이 김의식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는 듯하다. 보르헤스가 난감한 누군가에겐 김의식도 난감할 것이다. 궤변처럼 들리지 않으려 보르헤스가 애썼듯, 김의식의 해설 방식에도 섬세한 부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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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낯설고 건조할 기호학적 접근이 불가피해 보인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가 더 오묘하고 풍부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은 동일한 단어(기표)가 세르반테스에 의해 사용되었을 때와 메나르에 의해 사용되었을 때 서로 다른 의미(기의)로 발화되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김의식의 해설 방식의 정당화는 동일해 보이는 작품 소재와 행위(기표)가 심지어 동일인(작가 자신)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도 다른 의미로 발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우리가 수긍하느냐에 달렸다. 이처럼 기표 혹은 작품의 물적 차원의 변동 없이 의미 차원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독특한 방식, 그 편집적 성격(editorial character)에 주목하여 김의식의 작품들을 ‘거듭 고쳐 읽는 뼈’라 명명해도 좋지 않을까? (이것이 ‘거듭 고쳐 쓴 양피지’(palimpsest)의 패러디임은 물론이다.)  
김의식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기표는 ‘뼈’와 ‘쓰기’―혹은 쓰기라는 행위의 결과물로 남겨진 유사-문자들(pseudo-letters)―이다. 그렇다면 두 기표 각각은 어떻게 동음이의적으로 다양하게 발화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원론적인 가능태(possible)가 아니라 실제적 잠재태(virtual), 즉 활성화의 현실적 가능성이다. 이 잠재태의 실현 가능성은 각각의 기표가 얼마나 다른 기표들을 그 주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 하는 기표의 활발한 치환가능성에 있다. 물론, 그러한 기표의 치환 (혹은 기표의 자유로운 미끄러짐) 과정에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작품 오브제가 지니는 물질적, 감각적 매혹임을 김의식은 잊지 않는다. 단일한 뼈는 거대하게 키우고, 크지 않은 뼈들은 집적시켜 자연사박물관을 연상시키는 다소 건조하고도 엄숙한 공간에 압도적인 규모로 설치하는 방식은 관람자들의 눈길을 즉각 사로잡아 뼈가 환기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의들이 피어나게 만드는 탁월하고 영리한 장치였다.
먼저 뼈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뼈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그것은 흔적(trace)이다. 뼈는 분명 우리 눈앞에 놓여 있지만, 그것이 발화하는 방식은 즉물적인 현전으로서가 아니다. 그것은 흔적으로서,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지표(index)로서 작동한다. 그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뼈를 표상해온 방식이다. 사실 ‘뼈’란 참으로 많은 의미의 갈고리들을 지닌 매혹의 오브제이다. 당장 김의식 작가만 하더라도 트라우마와 고통을 잊기 위한 망각술의 칠판으로 처음부터 뼈를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일상 사물들이 하얗게 탈색되고 탈의되어 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통사고의 참담한 장면에서 충격과 고통으로 김의식을 사로잡은 뼈가 이후로 다른 일상 사물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다층적 매혹으로 여타의 오브제들을 압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뼈를 흔적으로서 발견하고 그 유혹의 갈고리에 걸려든 사람의 다음 행보는 추적(tracing)이다. 작가도 관람자도 모두가 추적자들이다. 추적은 교통사고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트라우마적인 과거를 향할 수도 있고, 생명체 보편의 공적이고 더 오랜 (자연사박물관적인) 과거를 향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추적 과정에서 뼈라는 동일한 기표가 고통, 사고, 폭력, 죽음, 원시도구, 자연, 역사 등등의 다양하게 차이 나는 기의들을 발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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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은 그에게 대중적 유명세를 가져다 준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ing for Meaning』(1946)에서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했다.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고통에 처했을 때 의미를 추구하는 그 본연의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한다는 것이다. 하여 그는 호모 사피엔스의 운율을 살짝 틀어 인간을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라 규정했다. 고통 가운데 고민하며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 인간에 관한 이 같은 프랭클의 통찰이 김의식 작가의 작업과 그 해설 방식을 이해할 또 다른 실마리를 던져 준다.
뼈 위에 쓰기를 수행하는 김의식의 작업의 출발점은 무엇보다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잊고자 하는 망각술은 애초에 작업의 전부일 수도, 종결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지우기만으로 지워지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란 없기 때문이다. 호모 파티엔스가 던지는 묵직한 통찰은 고통을 탈감작(脫感作)시켜 그것이 더 이상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면, 즉 망각의 기술에는 반드시 그것을 달리 의미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프로이트가 트라우마 환자의 치유 과정에서 발견했던 반복적인 투사(projection) 작용과도 유사한 것이며, 기호학적으로 보자면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로 미끄러지는 차연(différance)의 논리와도 같은 것이고, 김의식이 자신의 ‘뼈’와 ‘쓰기’에 대해 계속 다른 의미들을 부여해가는 이유이자 원리이다.
그러므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 시작한 망각술로서의 작업이 트라우마의 대상인 ‘뼈’ 위에 ‘쓰기’를 수행함으로써 완결된다는 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쓰기’는 본질적으로 ‘의미’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비록 결과물로 남겨진 기호들은 해독이 불가하고 패턴에 가까워진 유사-문자들이지만, 그 쓰기를 수행하는 과정은 머릿속에 출몰하는 수많은 의미들로 점철되었을 것이다. 그 넘치는 의미들이 결국 뼈라는 오브제와 쓰기라는 행위를 지워진 의미를 넘어 새로운 의미의 차원으로 데려간 것은 아닐까? 김의식의 뇌리에서 그것은 태초에서 우주시대까지, 감각되는 물질계에서 초감각적 세계로까지 확장을 거듭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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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궁금증은 이러한 작업이 언제까지 반복될 것인가이다. 김의식 작가의 작품들은 원론적으로는 동음이의적 확산의 열린 구조를 지닌 것이지만, 최근의 작업 유형이 계속 반복된다면 동어반복적 순환의 폐쇄 회로에 갇힐 것 같다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logotherapy)에 따르면 충분한 의미화는 곧 치유이므로 더 이상 트라우마의 자리를 맴돌 이유가 없다. 아직 때가 아니라면 언젠가는, 의미의 궤적뿐 아니라 오브제의 궤적도 확산의 열린 구조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